열왕기상/역대하 초반부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역시 성전의 건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하고 드리는 기도 중에 새롭게 눈에 들어오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왕상 8:12-13에는 솔로몬이 성전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계실 곳'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8:27-29에 보면 약간 다른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서 우선 솔로몬은 하나님은 땅 위의 건물에 계시기에는 너무나 크신 분이시라는 고백을 합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이름'이 그 성전에 있을 것이다라는 것을 알려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말이 그 말 같지만 이 미묘한 차이가 상당히 큰 의미가 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기 전에는 사사들, 사울, 다윗, 그리고 솔로몬도 '산당'이라는 곳들에 가서 제사를 드립니다. 이 '산당'이란 성물이 모셔져 있다든지, 신비체험을 할 수 있다든지 하는 특수한 장소들을 말합니다. 우리 고대 문화에도 산신령들이 있었던 것 처럼 고대인들에게 '높은 곳'의 의미는 하늘에 가장 가까운 곳, 신들이 인간과 접촉하는 곳으로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어떤 신들은 우상을 세워 놓음으로써 우상신의 임재가 보증되는, 아예 산당에 '거주'한다고 여겨지기도 했었습니다. 솔로몬도 온통 금칠을 한 근사한 성전을 지음으로써 위대하신 하나님이 그 곳에 정착하시려나 하고 잠시 바램을 가졌던 것일까요?

그의 기도에는 '성전을 향해', 혹은 '성전에서' 기도하면 들어달라는 기도의 제목들이 쭉 나옵니다. (아마 지금도 유대인들이 굳이 통곡의 벽에 가서 기도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솔로몬이 구한 것들은 다 하나하나 참 좋은 것들입니다. 무슨 개인적인 이득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지도자로서 진심으로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한 기도였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뜻밖에도 다른 곳에 초점이 가 있습니다.

일단, 성전의 역할은 하나님의 '이름을 기리기 위한 곳'이라고 정확하게 알려주십니다. (왕상 9:3) 조금 거칠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응답은
1) 성전은 거룩하게 구별되어 하나님께서 기도를 *듣는* 곳이지 무슨 효험있는 부적이나 산당같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장소가 아니다,
2) 너는 네 아버지 다윗처럼 살아라...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 부분은 열왕기와 역대기의 표현이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역대기에는 추가된 부분이 있는데, 7:12 후반부 '이곳을 택하여, 내가 제사를 받는 성전으로 삼았다.'에서 시작해 15절까지의 구절이 더 들어가 있습니다. 역대기는 성전을 막 재건하기 위해 애쓰고 있을 때 쓰여졌기 때문에 아무래도 성전의 특수한 위치를 더욱 강조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하나님은 단호하십니다. 추가된 15절에서도 성전에서 기도하면 '접수'해 주시겠다는 선에서 딱 끊습니다.

큰 문제들에 대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해결'의 방법은 그 전에 13-14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솔로몬이 걸었던 '성전을 향해'나 '성전에서' 라는 (쉬운) 조건이 아니고, 공동체("나의 백성")의 '겸비+기도+악한 길에서 떠나면'이라는 (어려운) 조건이 붙습니다. 지극한 신앙적 성취물로서 성전의 '효험'을 기대했던 솔로몬의 마음을 하나님은 꿰뚫어 보신 것 같습니다. 특별히 covid-19 판데믹 시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바로 이 7:13-14의 말씀은 직접적인 도전과 적용으로 다가옵니다.

그런 의미에서 찬양곡 한 곡:
https://youtu.be/e-jpdObqJz8

 

언약궤/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는 이야기가 사무엘하 6장과 역대상 13,15,16장에 걸쳐 나옵니다. 기본적인 줄거리는 같은데, 디테일에서 흥미로운 차이점들이 있습니다. 사무엘하에서는 다윗이 왜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려고 했는지 이유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사무엘하에 나온 문장만 보면 마치 다윗이 대군을 끌고가서 '법궤 내놔' 하면서 가져가려다가 문제가 생겨서 좀 지체되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다윗성에 마침내 입성할 때에도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이 경박스럽게 춤추면서 들어왔다고 빈정거린 일화가 좀 더 자세히 나옵니다. 한때는 다윗을 사랑해서 자기 아버지까지 속였던 미갈이었는데, 이제는 다윗과 쓴 말들을 서로 주고 받는 모습으로 나옵니다. 


역대상에서는 다윗이 왜 법궤를 가지고 오려했는지 설명이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사울 때 제대로 관리(?)를 못했던 잘못을 더이상 방치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좀더 깊게는 다윗성(예루살렘)을 정치와 종교의 통합적인 중심지로 삼겠다는 의지를 보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결정은 온 백성들의 지지를 통해 내려졌다는 언급도 있고, 법궤를 가져오는 과정도 좀 더 치밀합니다. 무엇보다도 첫번째 시도의 실패를 교훈삼아, 원래부터 성막과 법궤를 다루는 레위인들이 전면에 나서면서 이 프로젝트를 정확한 규례에 맞춰 수행하게 됩니다. 전에 이야기했던 시편 삼인조(헤만, 아삽, 에단/여두둔)와 그들을 보좌한 14인조 밴드에 대한 언급도 나오고, 레위인들이 사후관리도 확실히 하게 되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한편, 미갈에 대한 얘기는 딱 한 줄 나오고, 그에 대한 다윗의 쌀쌀한 비아냥은 생략되었으며, 미갈의 후속 이야기에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둘 다 이 이야기 직후, 법궤가 다윗성에 안착한 후에 정말 중요한 기사를 거의 똑같이 전달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영원한 왕조를 약속하신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거처를 마련해 주고 싶다는 서원을 하자 하나님께서는 '넌 됐고... 오히려 내가 너의 집안을 세워주겠다'라는 [무조건적인] 약속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대상 17:9-14) 물론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다윗을 이어 성전을 세운 솔로몬을 떠올렸겠지만,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아들'과 영원한 왕국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이 약속은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의 백성들에게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자녀가 될 것이다'(계21:7)라는 약속으로 이어집니다. 다윗에게만 주는 약속이 아니라 다윗을 통해 믿음의 백성이 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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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즉위에 관한 이야기가 사무엘하 1~5장과 역대상 10~14장에 겹쳐서 나옵니다. 전체적인 이야기는 비슷하지만, 약간의 디테일에서는 차이가 있기도 합니다. 역대상에서는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를 아우르는 왕으로 바로 세워진 것 처럼 나와있는데, 사무엘하에서는 몇 년 동안은 약간의 내전 상태에 있었던 것을 알려줍니다. 이밖에도 대체로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에는 북이스라엘 쪽 지파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고 다윗 왕에 대해서도 약간 비판적인 지지의 모습을 보입니다. 반면, 역대상하에서는 다윗에 관해 좀 불편한 이야기들은 생략하고 다 넘어갑니다. 


역사자료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역대상하는 요즘 말로 약간의 '국뽕'이 느껴지도록 정교하게 여러 자료들을 정리하고 편집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역대상하는 왕들의 이야기 반에다가 언약궤/성전의 이야기가 나머지 반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뒷부분의 이야기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 율법과 성전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굳이 분류하자면 사무엘/열왕기는 백성들이나 지도자들이 율법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가졌던가 하는데에 촛점을 두고 있는데 반해, 역대상하는 성전을 둘러싼 이야기가 중요한 줄기가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던 이스라엘/유다가 왜 결국 완전히 패망하였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역사적 해석에 미묘한 차이가 있는 것이죠. 


그러나 이런 차이는 서로 보완하는 관점을 제공해 줍니다. 유대인의 정체성을 생각할 때, 각종 율법을 성실히 준수하고 성전에 정기적으로 가서 제사를 드리는 것, 이 두 가지가 핵심적인 사항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신약시대를 열어 가실 때, 예수님은 바로 이 율법과 성전/제사에 대한 완전하고 새로운 해석을 몸으로 보여주시게 됩니다. 지난 월요일 있었던 줌미팅에서 이동형목사님께서도 잠깐 언급해 주셨지만, 구약의 여러 인물들은 계속해서 실패하고 불완전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기독교에서 바라보는 구약의 모습은 계속된 실패의 연속 가운데서도 성실하게 '빌드업'되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에 마침내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선언하셨을 때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예수님 전후의 모든 (성전)제사를 폐기하고 완전한 제물이 되셨다고 선포하였을 때, 골수 유대인들이 느꼈을 당혹감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오래지 않아 성전은 완전히 파괴됩니다) 이런 유대인들의 정체성은 자신들의 역사를 돌아보며 정립되어 갔을텐데, 사무엘/열왕기와 역대상하를 비교해 보면서 어떻게 유대인들이 자기네 역사를 해석해 내었는지 들여다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읽기가 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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