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일들로 바쁘고 여러 궁리를 하느라 머리가 지끈한 것이 그리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죠.
얼마 전 찬양예배 무렵, 마리아와 마르다에 관한 에피소드를 한동안 오래 생각했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간이고 '예수님이 사랑하셨다'고 대놓고 언급된 몇 안되는 복음서의 인물들입니다.
이 둘이 함께 나오는 에피소드는 세 군데가 있습니다.
우선 누가복음에서는 72명의 떼거지 제자들을 대접하느라 짜증이 난 마르다와 그 와중에 예수님 말씀을 듣겠다고 발치에 앉아 있는 마리아에 대한 짧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평소 누가복음의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에서 듣는 전형적인 교훈이라면...
결국 '좋은 것'을 택한 마리아처럼 본질적인 것에, 예수님 본인에게 더 우리는 마음을 쏟아야 한다... 그런 것이겠죠?
물론 은연 중에 마르다의 선택은 어리석은 것이었던가 하는 암시도 얻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하는 교회 일이 좀 많아져서 진이 빠지거나 할 때면 혹 내가 마르다인가 싶어 늘 떠오르는 인물들과 일화이기도 하구요.
연초의 여러가지 일정과 찬양예배 준비에 지쳐갔던 나는, 에구,,, 또 마르다가 되어가고 있구나... 하고
있었습니다.
뭐...
어떻게 보면 모두가 투잡 쓰리잡 뛰어야 하는 우리 교회 형편상 제직들 모두가 마르다 족속이 될 수 밖에 없긴 하죠.ㅋ
그런데 일단 마르다가 되고 보니 요 마리아가 얼마나 얄밉던지요.
아니 누구는 좋은 거 몰라서 일하나? 싶죠.
나도 구질구질 귀찮은 일들은 잊고 마리아처럼 찰싸닥 붙어 앉아서 좋은 말씀도 들으면서 그러고 싶다는 생각을 마르다가 하지 않았을까요.
왜
예수님은 마르다의 그런 심정도 몰라주고... 아니 지나가는 말이라도, 너도 일 그만하고 마리아처럼
여기와서 내 말을 들어보렴, 그 정도 한마디만 덧붙였어도 옳다 됐다 하고 떨거지 제자들이야 밥을 챙겨먹든 말든, 그냥 그 핑계로
눌러 앉았을텐데 말이죠.
왜 교회 일을 하면서 결국 마리아처럼 못되고 마르다처럼 되어가는지 살짝 억울한 생각이 생기면서 도대체 왜 성경은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힘을 빼는 것일까 의구심이 생겼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자매는 두번 더 등장하는데요.
요한복음에 두 자매의 오빠 혹은 남동생인 나사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에서 한번 (11장), 그리고 마리아가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는 장면에서 한번 (12장) 이렇게 나옵니다.
특히 요한복음 12장에선 어쩌면 그때도 하는 짓이 똑같은지요.
마리아는 나사로 오빠랑 또 예수님께 찰싸닥 붙어 있다가 급기야 비싼 향유를 깨서 예수님의 발에 붓는 충격적인 액션을 합니다.
마르다는...
아직도 저녁 식사 시중을 하고 있네요.
못말리는 두 자매입니다.
이쯤되면 마르다는 일만 하다가 훅 가버렸나... 왠지 남 이야기 같지 않아 마음이 쓸쓸했습니다.
불쌍한 마르다...
여러 설교나 성경공부에서도 예수님의 발 앞 자리를 좋아했던 마리아에게 늘 밀리는 캐릭터입니다.
Martha 마르다... 우리말로 왠지 촌스런 발음이기도 하구요... 그래도 '말따' 뭐 이런 표기보다는 나아보입니다.
마리아야 뭐 성경에 워낙 여러 명의 마리아가 등장하는 데다가 모두가 늘 좋은 일에 결부되어 나오기 때문에 이름에서 벌써 호감을 먹고 들어갑니다. 심지어 옛날 교부들 중에는 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간음했다 용서받은 무명의 여인을 모두 동일인이라고 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예술, 문학 작품 속에서도 그런 뉘앙스를 풍기는 경우가 많구요.
하지만 여러 번 여러 마리아들의 이야기를 읽어 보았지만 이 마리아--굳이 말하자면 베다니의 마리아는 다른 마리아들과는 또 다른 나름대로의 캐릭터인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복음서의 형태로 마침내 초기교회 공동체 안에서 문서로 작성될 때까지 이 두 자매와 나사로는 늘 한 세트의 이야기로 전승이 된 것 같습니다. 복음서 저자들 또한 '베다니의 그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남매들'이라고 굳이 꼭 찍어 얘기하고 있구요.
그런데 이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남매들의 전승에는 특히 이 두 자매들이 예수님과 굉장히 가까운 사이였다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 측근 중 예수님 면전에 대놓고 따지는 인물이 몇 명 없는데요. 천방지축 베드로가 우선 떠오르지만 제자급이 아닌 사람들 중에서는 바로 이 자매들만큼 가까운 사람들이 없는 것 같습니다.심지어 마르다 같은 경우는 예수님께 세번 씩이나 감히 따집니다. 한번은 아니 왜 마리아가 일도 안하고 있는데 가만히 계시냐고 따집니다. 또 한번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이 돌아올 때 마을 입구까지 달려나가 당신이 시간 맞춰 왔더라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거라고 타박합니다. 물론 마리아도 예수님을 맞이하여 똑같이 원망을 쏟아 놓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에서 돌을 치우라고 했을 때 마르다는 나사로가 죽은지 이미 4일째라 냄새가 날 거라고 최후의 딴지를 놓습니다. 그 긴박하고 모두의 감정이 한껏 북받쳐 있는 그 순간에 말이죠.
성경에는 자세히 나와있지 않기 때문에 순전히 추측하고 상상할 뿐이지만 왠지 마르다는 예수님과 나이가 비슷하거나 조금 어린 큰 언니/누나이고 나사로는 그보다는 약간 젊은 20대 초중반의 청년, 그리고 마리아는 막 어른이 되어가는 10대 소녀이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이 듭니다. 큰 잔치를 꾸리고 준비할 경험과 능력이 있는 마르다와 좋은 일에 쓰려고 향유를 모아두고 있었던 마리아의 나이대는 좀 차이가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리아가 일 안 도와준다고 마르다가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도 저 약간 철없는 막내에게 이렇게 바쁠 때는 좀 언니도 도와줄 수 있는 거라고 '오빠 예수님'이 얘기 좀 해달라는 작은 투정 같다는 상상을 해 봅니다.
예수님이 이들을 대할 때도 어떤 특별한 살가움이 느껴집니다. 마르다의 따따부따에도 베드로에게 종종 하듯이 단호하게 꾸짖지 않으시고
오히려 마르다야, 마르다야 하고 두번 이름을 불러줍니다. 버럭 화를 내는게 아니라 달래주려는 말투인거죠. 그리고 나중에는 (어린) 마리아가 슬퍼 우는 모습을 볼 때는 그 마음이 비통하여 눈물을(!)흘리기까지 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감수성이 드러나는 몇
안되는 일화들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마리아와 마르다를 살펴 보다가 마르다에 대해 그동안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르다는 일 하느라 분주함 속에서 본질을 놓친 어리석은 여인이 아니라 어쩌면 예수님 주변에서 가장 예수님의 의미를 잘 이해했던 사람이자 예수님 발치를 떠나지 않았던 마리아보다도 어쩌면 오히려 더 예수님과 대화가 통했던 사람이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본격적으로 고백하는 사람이 베드로이고 그 말을 내뱉자 마자 예수님께 말조심 하라고 한바탕 혼이 나는데요. 요한복음에서는 그 중요한 -신학적으로든 신앙적으로든- 고백을 하는 사람이 바로... 마르다(!)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의 예수님이 허위허위 마을 입구에 다다른 그 긴박한 장면에서 예수님과 마르다는 요한복음의 중심을 관통하는 정말 중요한 신앙문답을 나눕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 말을 했다고 베드로에게 했던 것처럼 딱히 혼을 낸 것도 아니고 오히려 문맥으로 보아 예수님은 바로 동생 마리아는 괜찮은지 (혹은 마리아도 너처럼 확신하고 있는지) 물어보신 것 같습니다. 결국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마리아는 큰 언니처럼 침착하게 예수님과 신앙고백을 나눌 만큼 마음이 탄탄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딱 한마디 던지고 발치에서 울기만 합니다. 그 모습에 예수님도 마음이 아파 우시고 서둘러 나사로의 무덤으로 향합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마르다는 막판에 최후의 딴지를 놓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그 중요한 신앙고백을 했던 마르다가 마치 도마가 내 손을 집어넣어 보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최후의 순간에 믿음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죠.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고 약간 신경질적으로 느껴질 만큼 단단히 면박을 줍니다.
이 모든 기적의 시간들이 지나고 나중에 12장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마지막 올라갈 때 마리아는 향유 옥합을 깨뜨립니다. 아마도 결혼할 때 쓰려고 준비한 것이었을 테지만 마리아는 예수님께 자기가 드릴 수 있는 마지막 장례 예물이 될 것이라는 걸 직감했을 겁니다. 그렇게 마리아가 감성적인 작별의 일화를 만들며 동생들이 예수님의 베다니에서의 마지막 저녁을 함께 보내고 있는데 마르다는... 정말 일을 너무 좋아했던 것일까요. 여전히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마르다! 그 센세이셔널한 순간에 마르다는 왜 또 딴 데서 일을 하고 있는 걸까요.
아마도 큰 언니 마르다는 이미 모든 것을 알았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마리아가 눈치챘듯이 마르다도 예수님이 이번에 가는 길은 당신의 죽음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도 물론 알았을 겁니다.
하지만 마르다는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실 거라는 것도 분명히 알았을테죠.
그녀가 이전에 가졌던 마지막 일말의 의심은 죽었던 동생이 과연 예수님 말씀대로 살아나면서 함께 사라지고 그녀의 용기있었던 입술의 신앙 고백은 이제는 가슴 깊이 확신으로 자리 잡았을 거구요.
그래서 마르다는 여전히 저녁 식사를 준비합니다. 마치 며칠 후면 예수님께서 다시 돌아와 또 같이 식사할 것을 알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교회 일을 하면서 마르다처럼 되지는 말아야지 여러 번 다짐하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예수님과 거침없이 소통하는 마르다가 부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떠나 보내는 마지막 밤에도 저녁 식사를 준비할 수 있는 확신이 있었던
그 마르다가 될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작은 깨달음이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