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는 유대인들이 모세 5경 중에서도 제일 먼저 아이들에게 배우게 하는 책이라고 합니다. 마치 어렸을 때 할아버지께 조상님께 제사를 지낼 때는 이러저러해야 하느니라 하는 말씀을 듣는 것 같은 느낌이 떠오릅니다. 
레위기는 제목은 '레위'기이지만, 실제로는 레위 족속에 관한 이야기는 딱 세 절만 나옵니다. (어디에 무슨 내용으로 있을까요?) 사실은 대부분은 레위 족속 뿐만 아니라 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통으로 적용되는 규례들의 모음입니다. 고맙게도, 여러가지 복잡해 보이는 규정들을 잘 정리한 도표들이 인터넷에 많이 있습니다. 다만, 수천 년 전 제사의 방식이 예수님 이후, 그리고 현대 사회에 어떻게 적용이 되는가 하는 질문은 더 깊은 생각을 요구하는 듯 합니다. 고대 사회의 상황에 맞춰진 여러 정결 예식이나 공중 위생, 음식에 대한 규정들은 그대로 현대로 가져오기에 곤란한 지점들을 만듭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고대의 규정들을 당시의 상황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많은 사람들이 고민을 하였습니다. 수 세기가 흐르는 동안 학자들과 랍비들이 여러 상황에 따른 세부 규정들을 만들어 오면서 유대 율법을 각 당대의 실생활에 적용하려 했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율법 규정을 확실히 지키는 부분과 일부러라도 깨뜨리는 것 같은 부분들이 섞여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논란의 대부분은 율법의 세부규정이나 관습들을 아랑곳하지 않는 예수님의 태도에서 기인합니다.


유대교에서 율법은 무조건 완전하다는 전제로 시작을 합니다. 그러나 시시때때로 업데이트와 세부규정의 추가가 필요한 '율법'이 과연 그 자체로서 이미 완전한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왔다' (마 5:17)라고 선포하셨을 때 정통 유대인들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이 무슨 말도 안되는 불경한 소리인가!... 왜냐하면 예수님의 선언은 율법이 '아직' 완전하지 않다라는 암시를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 10:4)라고 이야기했을 때, 좀 열심있다 하는 유대인들이라면 신앙의 근본이 흔들리는 큰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레위기는 19장에 나오는 두 구절이 핵심이라고 합니다. 하나는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이고, 또 하나는 저 유명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라는 말씀입니다. 앞뒤의 모든 규례들은 이 두가지 원칙에 바탕을 두고 펼쳐져 나간 것입니다. 우리가 레위기를 읽을 때,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도 함께 비추어 보았으면 합니다. 과연 어떻게 레위기의 대원칙들과 여러 제사와 규례들의 의미가 그분의 삶으로 구현되었는가, 그래서 궁극적인 율법의 완성자가 되셨는가 하는 면에도 관심을 두고 읽어 봅시다.

모세오경을 읽어 오면서 여러 율법 규정들을 보았습니다. 오래 전 옛날의 생활상을 들여다 볼 수도 있었고, 몇몇 중요한 규정이나 성막 모형 등은 후대(특히 예수님 시대)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레위기와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보면서 발견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나씩 공유하려 합니다. 소개된 성경 구절들은 꼭 한번 찾아서 본문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2장 21-24절에 보면 예수님이 태어나고 나서 세가지 율법에 정해진 예식을 따르는 것이 나옵니다. 우선, 첫째는 생후 8일째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이 할례는 이스라엘 민족이 십계명을 받기도 훨씬 이전에 하나님이 내리신 원초적 명령이라(창세기 17:9-14), 그야말로 율법 중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현대 유대교에서 조차도, 원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안식일일지라도 할례만은 예외가 되어 행하는 정도라고 합니다. (안식일 준수는 십계명에 실려있습니다.) 신약시대에 사도바울이 할례를 놓고 벌인 논쟁이 얼마나 유대인들의 아이덴티티를 흔드는 근본적인 논쟁이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다음은 얼마 지나서 가족들이 성전에 올라가서 하는 예식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모세의 법'은 사실 두가지가 섞여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출애굽기 13:1-2와 민수기18:15-16에 나오는 '첫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는 규례'입니다.  사람과 동식물을 포함한 모든 첫 소산은 하나님이 레위인 중 아론 집안이 맡았던 제사장들에게 떼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첫 소산만은 부모가 은 다섯 세겔을 제사장에게 지불함으로써 그 첫 아이를 다시 사는 것으로 소유권(?)을 돌려받는 절차를 거칩니다. 여기서 은 한 세겔은 노동자의 4일치 품삯에 해당하는데 성전의 세겔은 프리미엄이 1/5 정도 더 붙어서... 약 5일 정도 품삯이 됩니다. 은 5 세겔, 즉 대략 25일치 품삯을 지불해야 하니 적지 않은 금액입니다. 

 

또 하나는 레위기 12장에 나오는 산모의 정결예식입니다. 그런데 레위기 12:8에 보면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여인은 비둘기 둘을 바쳐서 하나는 번제로, 다른 하나는 속죄제물로 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가족들이 그리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세가지 율법을 예수님의 부모는 유대인으로서 성실하게 준수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정확하게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누가는 확인시켜 줍니다. 흥미롭게도, 바로 이어지는 시므온의 기사에서는 성령이라는 단어가 세 번 나옵니다. 세 번의 율법과 세 번의 성령, 율법을 완성하고 성령 시대로 넘어가는 예수님의 시작을 누가는 정교하게 구성한 것입니다.

 

 

 

신명기를 읽으며 광야생활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부터 민수기에 이르는 긴 광야의 여정 속에 가장 자주 접하는 말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불평'이나 '원망' 같은 말인 듯 합니다. 출애굽기에는 크게 최소 다섯 번, 민수기에는 일곱 번 정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나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거역하는 장면들이 나와 있습니다. 이 장면들을 살펴 보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여정을 거쳐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먼저 출애굽기에 나오는 아래 각 구절들을 함께 짚어 봅시다.

1. 출 14:9-12  
    - 바로의 군대에게 죽을까봐 두려워 '원망'
2. 출 15:22-24
     - 물 맛이 쓰다고 '불평'
3. 출 16:1-3
     - 배고프다고 '원망'하고 '항의'
4. 출 17:1-4
     - 마실 물이 없어서 '대들음' 
5. 출 32:1-36
    - 금송아지 신상을 만들고 '흥청거리며', '제멋대로 날뜀'

어떤 트렌드가 보입니다. 1번과 3-4번은 생존의 문제니 아마도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만의 강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큰 문제가 해결된 후의 2번과 5번의 사건들은 실소를 자아냅니다. 물 맛이 쓰다고 불평하지를 않나, 우상을 만든 것도 모자라 그 앞에서 제멋대로 흥청망청 뛰노는 작태를 보이지 않나, 출애굽이라는 거대한 여정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안이한 모습이 드러나 있습니다. 

그런데 4번까지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모세가 고뇌하거나 화를 내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불만을 해소시켜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5번 사건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시게 됩니다. 모세가 간신히 중재를 하고 레위지파 사람들이 멋대로 날뛴 사람들을 삼천 명이나 처단하고 나서야 하나님께서는 (자세히 언급되지 않은) 징벌을 내리고 사건을 접어 주시게 됩니다. 

그래도 출애굽기까지는 귀여운 수준의 불만입니다. 민수기에 들어서면 본질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내포한 사건들이 벌어집니다. 민수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좀 더 자주 진노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의 갈등이 깊어지게 됩니다. 각각을 좀 더 깊이 살펴 보았으면 합니다.

6. 민 11:1-3 
    - 이유도 없이 '심한 불평', 불로 징벌 당함
7. 민 11:4-34
    - 맛있는 음식을 못 먹고 만나만 먹는다고 '울면서 불평'
   - 메추라기 떼를 넘치도록 주셨으나 오히려 그로 인한 징벌을 당함
8. 민 13:25-14:3
    - 12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 낙담하여 '아우성'과 '통곡'하고 '원망'함
   - 40년 광야 유랑의 징벌을 당항
9. 민 16:1-50
   - 고라와 르우벤 지파의 지도자들이 합세하여 '반역'
  - 전무후무한 지진 징벌과 큰 전염병 징벌을 당함
10. 민 20:1-13
   - 물이 없어 '비방'하고 '다툼'
  -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징벌을 당함
11. 민 21:4-9 
      - '원망', 먹고 마실 것 없고, 만나가 지겨움, 불뱀으로 징벌 당함
12. 민 25:18
      - 모압 사람의 딸들과 음행하며 모압신에게 경배
    - 무려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는 최고의 징벌을 당함

6번에 이르면 특별한 이유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차라리 외부적인 위기가 이유라면 혹 수긍할 수도 있지만,  짐작도 할 수 없는, 그냥 싫은 그런 상태가 되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전에는 모세에게 불평하던 백성들이 하나님이 들으시는 앞에서 불평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점점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7 번은 조금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두번째 사건이 물 맛이 쓰다는 이유로 불평한 것 처럼 민수기의 두번째 사건도 음식 맛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이 발단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4절, 33-34절) '먹는 음식에 대한 탐욕'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처음 탐욕을 품은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섞여 살던 무리'라고 언급되는데, 출 12:38에 보면 야곱의 후손들 외에도 다른 외인들도 함께 출애굽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들의 태도는 훨씬 느슨했을 것임을 쉽게 짐작이 됩니다. 

문제는, 이들의 불평에 곧 이스라엘 백성들도 동조하게 되는데 그 불만의 정도가 ‘울며’ 불평할 정도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불평의 내용도 사실 관계와 다릅니다. 위에 읽은 출애굽기 기사에는 외인들 말고도 가축들도 잔뜩 데리고 나왔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가축들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고기 자체보다는 거기에 곁들일 별미나 양념들(5절) 같은 부차적인 것들에 마음이 빼앗겨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의 한탄에 보면 어떻게 ‘모든 백성’에게 고기를 줄까(13절)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너도나도 고기에 대한 욕심이 퍼져나갔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욕심은 33-34절에 가면 넘치도록 쌓인 메추라기를 주신대로 먹지도 못하고 죽었다는 표현으로 결말이 납니다. 시편 78:17-31에 같은 이야기를 다시 언급하는데 여기서는 너무 많이 먹어서 죽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원래는 한 달에 걸쳐서 먹을 만큼 엄청난 양을 주셨는데 탐욕 때문에 급하게 너무 많이 먹다가 (유대교 전승으로는 '배가 터져')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8번 사건은 유명한 12 정탐꾼 사건입니다. 12지파에서 선발된 사람들이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왔는데, 그 보고의 내용이 달랐던 것입니다. 오직 에브라임 지파의 여호수아와 유다 지파의 갈렙만이 가나안에 들어가자고 하였습니다. 나머지 10 지파들의 대표자들은 가나안 사람들을 무서워하고, 백성들을 선동하며 원망케 합니다. 그런데 그 선동의 내용이 심상치 않습니다. 가나안은 포기하고 '지도자를 세워'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자는 내용입니다 (14:4). 이 사건은 사실은 9번 사건의 복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또 크게 진노하시고, 이 정탐꾼들과 그 세대를 전부 정탐한 날짜 하루에 일년 씩 쳐서 40년을 광야에서 방랑하게 하는 징벌을 내리십니다.

9번 사건은 아마도 광야생활 반역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모세와 아론의 사촌이자 레위 지파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고라가 12지파 중의 제일 맏아들 지파인 르우벤 지파와 합세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는 장면입니다. 고라는 모세의 할아버지인 고핫의 다른 후손으로 고핫 자손들을 이끌던 지도자급 인사였습니다. 민수기 2~4장의 성막주변의 진영배치와 10장에 나오는 성막 행군할 때 배치를 보면 고핫 자손들은 르우벤 지파와 붙어다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는 단순한 불평 정도가 아니고, 유력한 지도자들을 250명이나 모아 공식적으로 세를 규합하여 제대로 반역을 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의 지도력을 부정하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도 거부합니다. 8번 사건에서 사태는 더 진전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반역은 성경 내에서도 전무후무한 땅이 갈라져 산채로 삼키우는 무시무시한 징벌에 마주치게 됩니다. 그리고는 진영에 전염병이 돌면서 무려 이스라엘 백성 만 사천 칠백 명이 죽게 되는 참혹한 결말에 이르게 됩니다.

10번 사건은 직전 사건들에 비하면 백성들이 불만을 가지는 것을 이해할 만 합니다. 물이 없으면 누구라도 무슨 수를 써 달라고 지도자에게 요구할 수 있을겁니다. ‘비방하기 위해 모이고, 모세와 다투었다’는 표현은 요즘으로 치면 데모/가두시위와 비슷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평범한(?) 해프닝으로 끝났을 이 사건이 급심각해지게 됩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사건이 이어서 벌어집니다. 하나님이 시킨대로 바위에서 물이 나오게 했는데, 하나님은 왜 모세에게 징벌을 내리셨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가겠다는 그의 평생의 꿈이 날아가게 되었습니다. 자세히 보면 모세는 바위를 '두 번' 지팡이로 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8절에 하나님께서 주신 지시는 '지팡이를 들고, 회중들 앞에서 바위에게 명하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출애굽기의 4번 사건(17:1-7)에서도 모세는 바위를 지팡이로 쳐서 물이 나오게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하나님께서 바위를 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번에는 말로 명령하라는 것으로 디테일이 바뀐 것입니다. 

모세의 잘못 첫째는 하나님의 명령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권능을 신뢰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한 번으론 혹시 안될까 싶어 두 번 바위를 쳤다는 주석들이 많습니다.) 가나안 진입이라는 중차대한 사명을 눈 앞에 두고 모세는 지도자로서 최종 시험에 실패한 것입니다. 

11번 사건은 6, 7번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원망의 내용은 똑같은 레파토리입니다. 특이하게도 '불'을 연상케 하는 '불뱀'이 징벌의 내용이 됩니다. 불뱀을 상징하는 구리뱀을 기둥 위에 달아 두면 그것을 보는 자마다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여러 해석들이 있지만, 신약으로 넘어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예표하는 구절이라는 주석들도 있습니다. 6번 사건에서 불로 이스라엘 진영을 깨끗하게 하신 것처럼, 여기서도 불뱀을 통해 회개와 구원이 이루어지게 합니다. 나중에 세례요한의 입을 통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으로 (마 3:11) 예수님이 소개됩니다. 세밀한 상징의 해석은 신학자들의 몫이지만, ‘불’이라는 이미지의 연결은 주의해 볼만 합니다.

마지막 12번 사건은 출애굽기의 마지막 5번 사건을 그대로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 모든 불평과 반역의 종착역은 결국 우상 숭배로 귀결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는 모압 여인들과 어울리다 이방신인 바알브올에게 결합/부속될 정도로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이들의 죄악으로 인해 극심한 전염병이 발생하고 무려 2만 4천 명이 죽는 대참사가 일어납니다. (고라의 반역 때보다 더 심합니다.)

이 사건에서는 시므온 지파와 레위 지파의 엇갈린 선택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와중에 시므온 지파의 지도자 아들놈이 모압 여인을 진중에 데리고 옵니다. 마침내 레위 지파의 젊은 제사장 비느하스가 타락한 시므온 지파의 아들을 처단함으로써 전염병은 끝납니다. 그 공로를 두고 하나님은 비느하스와 평화의 언약을 맺게 됩니다.  사실, 창세기에서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 학살사건에 연루된(창 34장) 엄청난 죄과가 있습니다. 야곱의 유언에서도 단짝으로 엮어져 (분깃을 받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흩어져 살게 될 것이라는 암울한 예언을 얻게 됩니다.(창 49:5-7) 

레위 지파는 비록 모세라는 걸출한 지도자를 배출했지만, 실상은 아무런 생산적인 분깃을 받지 못하고 성막과 주변의 허드렛 일만을 맡는 하층민이 됩니다. 외국인과 과부, 고아들과 같은 반열에 놓여 신명기에 나오는 여러 십일조 규정에서 꼭꼭 챙겨줘야 되는 계층으로 전락합니다. 그나마 이 사건을 통해 비느하스가 줄을 잘 서면서(?) '평화의 언약'을 얻어 이 지파는 멸족은 당하지 않고 다른 각 지파의 땅에 흩어져 살게 됩니다. 이에 반해 시므온 지파는 출애굽 당시만 해도 인구 기준으로 무려 서열 3위의 위치였지만, 이 사건 등을 거치면서 가나안에 들어갈 때에는 꼴찌로 전락하게 됩니다. 약속한 땅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유다지파의 땅에 기생하며 살다가 결국 여기저기 흩어져 소멸하게 됩니다. 신명기의 마지막 부분에는 모세가 각 지파들을 위해 축복기도를 하는데, 시므온 지파는 거기서도 빠지게 되는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출애굽기와 민수기에 나오는 이 일련의 사건들을 관찰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광야의 여정을 거쳐왔는지 짐작해 볼 수 있었습니다. 일부 외인들에서 시작한 불평이 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퍼지고, 12지파의 대표격인 사람들이 불신앙의 죄를 범하고, 레위 지파에서 성소 기물들을 다루던 고핫 자손과 12 지파의 장자격인 르우벤 지파 일부는 반역까지 합니다. 더해서 이 모든 백성의 지도자 모세조차 실족하고, 급기야는 이방신을 숭배하다가 한 지파 전체가 궤멸적 타격을 입게 되는 치욕적인 사건도 발생합니다. 



곧 가나안에 들어갈텐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연 잘 준비된 것일까요? 신명기의 끝부분에는 모세의 준엄한 경고과 축복이 함께 있습니다. 모세는 지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자신과 하나님 속을 썩여 왔는지 가감없이 털어놓습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업적으로 인한 상급으로 주어진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완벽하게 준비된 백성이라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여전히 부족한 백성이지만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 그런데, 점점 심각해지는 실패의 이야기들만 실린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성경에 실리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들도 많이 있었을 겁니다. 수많은 불평과 심지어 반역 사건까지도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하였다는 최종적인 사건에 있습니다. 여러 잘못과 실패를 저지르지만, 이를 통해 교훈을 얻었습니다. 비록 무명일지라도, 하나님의 인도를 끝까지 따르며, 새로운 역사의 장으로 진행해 나갈 능력을 키워낸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족함도 보았지만, 또 그 백성들의 믿음과 소망, 그들 앞에 놓여진 큰 축복도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불평과 반역의 사건들 속에서도, 출애굽기와 민수기의 큰 흐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제 이집트는 완전히 떠났고, 곧  우리는 가나안으로 들어간다’라는 메세지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여호수아서는 출애굽기/민수기와 완전히 반대의 성격입니다. 계속되는 성공과 승전보들이 전면을 차지하고 있다면, 그 속에서 잉태되고 있는 실패의 기운들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찬찬히 살펴보면서 역사의 여정을 따라가 보게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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