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이스라엘은 기본적으로 유다와 베냐민을 제외한 10지파가 연합을 해서 시작했습니다. 다윗도, 솔로몬도 유다의 왕으로 먼저 추대되고, 나중에 다른 지파들의 장로들에 의해 이스라엘 전체의 왕으로 다시 세워졌었습니다. 역대상 29:22에 보면 솔로몬을 second time으로 왕으로 삼았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래서 역대하 1장에는 솔로몬 아들 르호보암도 일단 솔로몬의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다음으로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추인을 받기 위한 모임을 세겜(예루살렘이 아니라 북이스라엘의 중심지)에서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거기서 사단이 나서 결국 나라는 쪼개지고 각자의 길을 가게 됩니다.
북이스라엘은 처음에는 에브라임 출신인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모였지만, 연합체이다보니 각 지파 출신들이 차례로 쿠데타를 일으키고 각 왕조들이 길게 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에 반해 유다는 다윗의 혈통을 쭉 이어가기는 하지만, 초창기를 제외하고는 국력도 계속 북이스라엘에 밀리고 나중에는 명맥만 유지할 뿐 주변 강국들에게 이리저리 밀리다가 망하고 맙니다.
전에 솔로몬이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이 가나안 전역을 통일하면서 서쪽의 지중해/페니키아 문명권의 시돈과 시리아/헷타이트로 이어지는 북쪽, 그리고 남쪽 이집트/아프리카/아랍반도 문명권을 연결하는 무역로들을 모두 확보하였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세웠다는 방어 성읍들과 이용한 항구들은 모두 이 무역로들을 따라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말기에는 동편 무역로를 관할하던 에돔, 다메섹 등의 요충지를 반란으로 잃게 됩니다. 거기다가 솔로몬 사후,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면서 중계무역의 거점 지위를 잃게 됩니다.
그나마 시돈과 인접했던 북이스라엘은 오므리/아합 때에 이르러서는 예전의 위용을 어느 정도 되찾아 옵니다. 오므리가 사마리아를 북이스라엘의 수도로 삼은 것은 다윗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은 것과 비슷합니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 왕은 북이스라엘의 솔로몬이라고도 부릅니다. (사치를 부렸다는 면에서...) 이에 반해 남유다는 르호보암 때 이집트 시삭왕의 침략으로 예루살렘까지 완전히 털리고 나서는 국력이 크게 쇠약해집니다. (금방패에서 놋방패로 강등된 것이 상징적입니다)
남유다는 아사 왕 치세 때 어느정도 국력을 회복한 후, 여호사밧 왕이 북이스라엘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남북무역이 재개되자 예전의 영화를 잠시 누리게 됩니다. 여호사밧 왕과 아삽 왕은 자녀들을 결혼시키면서까지 남북동맹을 맺을 정도가 됩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아삽 왕은 최악의 우상숭배자였고, 여호사밧 왕은 남유다에 몇 안되는 그나마 하나님의 길에 있었던 왕들 중의 한 명이었다는 점입니다.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 준 이 역사적인 결혼동맹은, 그러나 남유다 왕조에 북이스라엘의 우상숭배가 깊숙이 침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아합왕은 엘리야와의 싸움으로 열왕기에 길게 나오지만, 남유다의 여호사밧의 행적은 역대하에 꽤 길게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이 왕들의 공로(?)는 '오므리가 한 나머지 행적과 그가 부린 권세는...' (왕상 16:27), 그리고 '여호사밧의 나머지 행적과, 그가 보여준 권세와, ...' (왕상 22:45) 등의 표현으로 정리가 되었습니다. 다른 왕들의 인생 써머리와 비교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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