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는 요시야 사후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바빌로니아에게 멸망당하고 맙니다. 철저한 종교적 개혁 정책이 수행되었지만 그 나라의 운명을 되돌리지 못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당시 이스라엘 역사가들에게는 무척 당혹스럽고 의아한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들은 요시야의 전임 왕이었던 므낫세 왕의 무려 55년 간에 걸친 배교와 악행 탓으로 징벌의 이유를 대기도 하고(왕하 24:2-4), 요시야의 후임 왕들과 백성들의 죄악 탓으로 멸망의 이유를 대기도 하였습니다(역대하 36:14-16). 그러나 자세히 보면 역대하 35장에 나오는 이집트의 느고 왕의 언급은 요시야 왕의 잘못 한가지를 암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간략하게 요시야의 최후를 묘사했던 열왕기에 비해 역대기 기사에는 요시야가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절차를 (심지어 이방의 이집트 왕조차 했던) 생략했다는 질책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당시 이집트는 바빌로니아에 대항하기 위해 예전의 라이벌이었던 앗수르와 연합군을 구성하러 가나안을 가로질러 가는 군사작전을 시작합니다. 유월절 행사의 재개와 같은 탈이집트 정책을 갖고 있던 요시야 왕은 이집트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 군사작전을 가로막기 위한 출전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역대하 기사에 따르면 이집트의 느고 왕은 가나안을 진입하면서 그 지역의 신인 여호와의 신탁을 미리 얻었음을 언급합니다. 그러나 요시야 왕은 예레미야라는 걸출한 예언자가 곁에 있었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무리하게 참전했다가 화살에 맞아 죽게 됩니다.
이 일은 느고 왕이 곧 예루살렘을 침략하고 왕을 볼모로 삼아 남유다를 이집트의 속국으로 만드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이집트의 손에 떨어진 가나안 지역을 두고 볼 수 없었던 바빌로니아는 결국 남유다를 완전히 점령하고 패망시켜 버리는 것으로 결말이 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집트-앗수르 연합군과 바빌로니아 사이의 전쟁 때 유다가 개입하지 않았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는데 아마도 요시야 개인의 운명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운명이 다했다는 것을 직감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나라가 급작스럽게 멸망하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게 되었는데, 예레미야서 뒷부분에 가면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의아한 마음도 엿볼 수 있습니다.
"... 우리는 우리의 입으로 맹세한 대로 할 것이오. 우리와 우리 조상과 우리 왕들과 우리 고관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우리도 하늘 여신에게 제물을 살라 바치고, 그에게 술 제물을 바치겠소. 하늘 여신을 섬길 때에는 우리에게 먹을 양식이 풍족하였고, 우리가 잘 살았으며, 재앙을 만나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제물을 살라 바치는 일을 그치고 그에게 술 제물 바치는 일을 그친 뒤부터는, 우리에게 모든 것이 부족하게 되었고, 우리는 전쟁과 기근으로 죽게 되었소.” 예레미야서 44:17-18 (새번역)
바빌로니아에게 패망하고 남은 일부 유대인 무리들이 예레미야를 끌고 이집트로 도망을 갔는데 거기서 그들을 장래에 대한 예언을 듣고 난 후 예레미야에게 쏘아 부치는 말입니다. 물론 예레미야의 대답은 이사람들아 정신차려라 하는 것이었지만, 위의 대화는 지금 우리가 가지는 질문을 그 때 그 사람들도 똑같이 가졌음을 알려 줍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말하면 위의 주장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과생들이 쓰는 말로는 충분조건 대 필요조건의 혼동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잘 섬기던 때에 나라도 부강했던 때가 여러 번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을 때 잘나갔던 것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 불순종 -> 부강한 나라? 라는 필요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그때나 지금이나 뭐가 잘 안되면 하나님 탓으로 돌리고 엉뚱한데 의지하려 하는게 인간인가 봅니다.
그러나 사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비단 유다에게만 일어난 일이 아니고, 블레셋이나 암몬, 모압 등과 같은 가나안 지역의 모든 약소국가들이 함께 겪은 세계사적 전환이었습니다. 사사기/사무엘/열왕기나 역대기/에스라/느헤미야가 쓰일 당시만 해도 이스라엘 역사가들은 크게 보면 권선징악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역설적으로, 이 참담한 실패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의 산이나 예루살렘 성전에만 계시는 줄 알았던 하나님이 전 세계, 전 우주적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중대한 계기가 됩니다.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해내신 구원자, 전쟁에서 이기게 해주는 신 정도의 이해에서 세계를 창조하고 세계의 질서를 운행하며, 궁극적으로 인류를 구원하시는 분으로 그 이해가 점차 확장되면서 유대교 신앙에 본질적인 업그레이드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나중에 후기 이사야, 에스겔, 다니엘서, 신구약 중간기 등을 읽으면서 어떻게 유대교가 더욱 확장되어가는지 더 공부해 보면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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